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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2. 26.

나는 한국사람인가, 스페인 사람인가?


 얼마 전 영화 '그린 북'을 봤다.
안 보신 분들을 위해 줄거리를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백인과 화장실도 같이 쓰지 못할 정도로 흑인들이 차별받던 60년대의 미국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한 흑인 뮤지션(닥터)과 그의 콘서트를 위해 운전사로 일하게 된 한 이탈리아 이민자(토니)의 우정에 관한 내용이다.
토니는 흑인이 썼던 컵을 쓰레기통에 바로 버릴 정도로 흑인을 싫어하는 사람이었지만 닥터와 같이 다른지역을 돌면서 함께 하는 동안 흑인들에 태도가 바뀌게 된다.


나에게 가장 와닿았던 닥터의 대사가 있는데 대략 이렇다:


난 무대에서 내려오면 그들(백인 청중들)에겐 그저 검둥이일 뿐이야. 
난 다르다는 이유로 흑인들 사이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해.
난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니면, 난 대체 뭐야?


자막 없이 봐서 100% 정확한 대사를 적을 수 없었던 점 양해바란다.
여하튼 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라면 다들 한 번 쯤은 해봤을법한 생각일 것 같다. 


내 경우에는, 스페인 사람과 살고 있고 동네에 한국사람도 없다보니 당연하게도 항상 스페인 사람들과 교류가 있는데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뭔가 섞여지지 않는 아니, 섞일 수 없는 그런 어떤 벽이 항상 존재하는 것 같다.


예를 하나 들자면,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자기들끼리는 이런저런 오만가지 것들에 대해 쉬지 않고 얘기를 하는데 나랑은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난 외국인이라서 평생 스페인에서 살아온 그들에 비해 알고 있는 범위가 적고 깊이도 얕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간단한 일상 외의 분야는 꼭 전문용어들이 나오기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분야가 아니라면 언어 장벽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느낌을 말로 설명한다는 게 참 어렵다는걸 새삼 느낀다.
한 마디로 최대한 줄이자면, 나는 스페인 사람들과 '문화적 공감대'가 거의 없어서 어느 정도 이상 친해지는 게 어려운 것 같다.
그리고 외모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다. 내가 아무리 스페인어를 잘한다고 치더라도 나는 그냥 '스페인어 잘하는 외국인'일 뿐이다.



영화에서의 '닥터'도 상류층 백인들 앞에서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공연을 하지만, 같은 화장실을 쓰는 것도 같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같은 호텔을 쓰는 것도 거부당한다. 그가 백인들 시중을 들고 잡일을 하는 다른 흔한 흑인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결국 누가 봐도 그는 백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가 백인인 것처럼 행동하는 아시안들을 가리켜 '바나나'라고 부른다고 한다. 겉은 노란데 속은 하얗다는 의미에서다. 그 바나나들은 같은 동양인과 어울리는 걸 싫어하고 때로는 자기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백인 사회에도 어울리지 못한다. 
(토종 한국인이 그러면 좀 재수없는 건 사실이지만 아주 어릴때 입양되었거나 이민자 2세라면 그들의 정체성 혼란은 정말 고통스러운 문제일 것이다)


나이 서른에 스페인에 온 나로서는 당연히 정체성 혼란을 심하게 겪지는 않는다.
한국에서도 혼자가 편했던 나는 스페인 사회에도 적극적으로 섞이고 싶은 마음도 사실 없지만, 스페인에서 8년 넘게 살다보니 또 여기 문화가 맞는 것도 있고, 가끔 한국에서 살던 시절을 생각할 때면 '거기서 어떻게 살았지' 하면서 한국에 살 때 겪었던 각종 스트레스들이 떠오르곤 한다.


그래서 결론은, 글을 쓰다 보니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좀 오버였던 것 같다.
난 스페인 문화에 완벽히 물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국에서 예전처럼 사는 것도 못 견딜 것 같고 (그렇다고 한국에 가고 싶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중간에 둥둥 떠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가끔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아마 토종 한국인이라도 외국에서 오래 살다 보면 이런 감정이 드는걸까? 싶기도 하다.


무작정 해외에 나가서 살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백하자면 나도 그랬었다) 그분들에게 한 번 더 신중히 이런 부분에 대해 생각도 해 보았으면.. 하고 조심스럽게 충고를 해본다.


말이 나온 김에, 현실 회피성 해외 이민에 대한 얘기도 다음번에 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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